 서양건축 양식이 혼재해 있는 근대 병원 <대한의원>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다. 답사를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간 <의학박물관> 앞에는 답사를 진행하는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김란기 대표를 중심으로 여러 분야 초청인들과 김란기 대표의 <건축과 사회> 수업을 듣는 경원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과 하룻동안 대한제국 건축 답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부지에 있는 <의학박물관>이 옛날에는 <대한의원>이었다. 이 건물은 다른 주변 건물들과 달리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 장안의 화제였을 정도로 건물 중앙 위쪽에 시계탑이 세워져 있고, 건물양식 또한 사진으로만 보던 옛 서양양식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김 대표는 실제로 옛 서양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이 건축물은 크게 네오바로크 Neobaroque 양식1)을 하고 있지만, 부분별로 시계탑은 비잔틴Byzantine 풍2), 벽면은 르네상스Renaissance 풍, 홍예석3) 은 노르만Norman 풍4)을 띤다.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이유는 이 건물을 지을 때 참여한 츠마기 요리나카妻木?黃와 관련 있다고 한다. 츠마기 요리나카妻木?黃는 대한제국 당시 건축을 담당하던 탁지부5) 건축소에서 한일신협약(1907.7)6) 이후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자리 인사 이동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하였고,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을 한 일본 건축가였다. <대한의원>은 ‘대한제국’ 의정부가 행정적 주체가 되어 설립하였고, 이 기관의 직속기관이었으며, 위생, 의육, 치병을 관장하는 ‘국립중앙병원’이었다. 또 황제의 칙령(제 7호)에 설립됐다고 한다. 건축 당시 <대한의원>이었던 만큼 건물 2층 내부에는 옛 의료기구나 이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옛 안경 전시실도 있었는데, 이는 1931년 하버드 의대를 나온 최초의 한국인 교수 김철 박사의 기증품이다. 전시물의 관람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온 김 대표는 “이 건축물은 건물 자체로 더 중요한 전시물”이라며, “옛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을 잠깐 보고 간 것이 부정적 시각이라, 한국 근대의 좋은 모습을 알 수가 없으니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을 보고 발전되어 가는 근대건축 역사를 알아가자”는, 이번 답사의 전반적인 취지를 밝혔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공업전습소>의 진실 <의학박물관>에서 도보로 이동하여 <공업전습소>로 갔다. <공업전습소>의 벽면색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으로 되어 있는데, 얼핏 보면 석조건물 같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면, 확실히 목조건물임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 역시 탁지부 건축소에서 설계했고, 지난 1981년 9월 25일에는 사적 27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 요시다겐조오吉田謙造가 시공을 맡아 1907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되었고, <공업전습소>는 대한제국 시기 상공업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돼 염직, 직조, 제지, 금은세공, 목조 등의 근대 기술을 교육한 기관이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하고 있다. 김 대표는 “현재 남아 있는 이 건물은 <구 공업전습소 본관>이라 불린다. 겉모습은 석조건물 같지만 건축물 밑에 환기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조건물이며, 형식도 일제식이기보다는 서양근대식 모양”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푸른빛 도는 회색의 벽면은 그 때 당시의 색일 것이라 추측한다”고 덧붙였다. 이 건물은 사실 알려진 대로 <구 공업전습소 본관>이 아니라 1912년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라고 한다. <중앙시험소>가 <공업전습소> 부지에 지어졌고, ‘조선총독부’는 1912~1913년에 사이에 <공업전습소>를 철거하면서, <중앙시험소>와 1년 정도 병존시켰으며, 진짜 <구 공업전습소 본관>은 <중앙시험소> 뒤쪽에 있었을 것이라는게 추측되는 이유이다. <공업전습소>의 건축물은 1912~1913년에 사라졌지만, 이름은 1922년 까지 여러 기관의 부설 개편과 여러 학교로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계속 사용되었고, 결국 서울공고로 이어진 과정에서 <중앙시험소>의 이름보다는 <공업전습소>의 이름이 부각된 것으로 본다. 건물 내부를 개방하지 않아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은 채 <공업전습소>를 떠났다.


궁 안의 이색적인 건물 <창경궁 대온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창경궁이었다. 창경궁 안에는 이질적인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창경궁 대온실>이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창경궁을 유원지로 만들어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지어 ‘대한제국’의 황실과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지어진 것이 <창경궁 대온실>이다. <창경궁 대온실>은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와 관계가 있지만, 확실하게 누가 설계했고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원예 학자였던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설계했을리는 만무하고 다만,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베르사유Versailles 원예 학교의 앙리 의젠느 마르티네Henri Eug?ne Martinet에게 의뢰했던 신쥬쿠어원新宿御苑의 온실 설계도를 따온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개방되고 있는 <창경궁 대온실>은 현재의 건축물과 거의 흡사하다. 건물 내부에는 여러 식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보일러실 등이 있다. 이러한 <창경궁 대온실>은 몇 번의 존폐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창경궁 대온실>은 경관상 문제가 있지만 한번 철거하면 영원히 되살리기 어려우므로 장기적으로 검토하자는 의견과 함께 절충안이 받아들여져 철거를 면하고 있다. 김 대표는 <창경구 대온실>의 의미를 “이 건물의 건축적 구도는 우리 근대 건축사에 획기적인 것으로, 우선 철제 기둥에 목재창틀을 사용하여 유리를 원활하게 끼웠을 뿐만 아니라 주물7)을 이용하여 트러스8)구조를 만들어 내었음을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석탄을 이용한 난방 보일러를 도입하였고, 독특한 배관은 이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의 건축은 유리와 철을 사용한 대공간의 창출이 핵심으로 <창경궁 대온실>은 근대 건축사에 큰 기념비적 건축물이면서 유리건축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민족 아픔의 시기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근대건축을 알고, 그 건축과 현대건축의 조화로움을 배워 가며 대한제국 건축물을 근대적 역사물로 인식했으면 하는 게 김대표의 바람이었다. 경원대학교 건축학과 5학년 황순재씨는 “오늘 답사는 근대건축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며 “일제 시대의 느낌이 나는 건축물이지만, 건축사에서는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이번 답사를 기획했던 건축문화학교 홍선희 총괄본부장은 이번 답사에 만족감을 나타나며 다음 답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대한제국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통해 당시 시대를 알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글 이석희 기자 slord23@naver.com
각주) 1)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 양식으로 화려하고도 변칙적인 건축 양식이 유행하였다. 2) 비잔틴 양식은 4세기경에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발달한 건축 양식으로 큰 돔을 얹은 집중식 교회당 건축이 특색이고, 내부는 모자이크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3) 위쪽이 아치형 같은 홍예문이나 홍예다리 따위를 트는 데 쓰는 쐐기 모양의 돌. 4) 11세기 초에,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생긴 건축 양식으로 넓은 뜻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속하며 높다란 측벽, 나무로 만든 천장, 구석구석에 조각된 기하학적 무늬가 특징이다. 5) 대한 제국 때, 국가 전반의 재정(財政)을 맡아보던 중앙 관청으로 고종 32년(1895)에 탁지아문을 고친 것이며, 순종 4년(1910)까지 있었다. 6) 1907년 일본이 한국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7개항 조약. 7)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든 물건. 8) 직선으로 된 여러 개의 뼈대 재료를 삼각형이나 오각형으로 얽어 짜서 지붕이나 교량 따위의 도리로 쓰는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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